"호시노씨는 왜 글을 쓰시나요?"
작은 노트에 메모하면서 프린트된 질문지를 양손으로 쥐고 노트북을 옆에 놓아둔 채 취재하러 온 분들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물어본다. 정말로 좋은 말을 해주길 기대할 때도 있고 관심은 없지만 일이니까 실례가 안 되게끔 관심 있는 척 연기해 줄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정말로 감사하다.
"배우로서 그리고 음악가로서도 바쁘신 와중에도 작가 활동을 하고 계신 이유가 어떻게 되시나요?"
에세이에 푹 빠지게 된 건 16살 때의 일이었다. 마츠오 스즈키의 「大人失格」 그리고 미야자와 아키오의 「牛への道」 세간에서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이 두 에세이집을 읽게 된 것이 계기였다. 학교에서 가벼운 연극 활동을 하고있던 한창일 때, 연기할만한 희곡을 찾으려 들린 서점의 연극 코너에서 나도 모르게 손으로 집어 든 책이었다. 글을 읽으며 배를 움켜잡을 정도로 크게 웃었던 건 처음으로 경험한 일이었다.
원래 어릴때부터 독서와는 거리가 먼 아이 었다. 감각으로 읽히는 만화는 굉장히 좋아해서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읽을 수 있었지만, 수필이나 소설 종류는 읽고 있는 도중에 늘 딴생각에 빠져서 멍하니 페이지만 넘기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철 안에서 깜빡 잠이 들어 전혀 모르는 역에 도착한 것처럼 책 속에서 홀로 미아가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두 에세이집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 손을 붙잡은 채로 책의 종착역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동경해서 글을 쓰게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멋지네요!" 작가활동에 대한 걸 물어봐주시는 분에게 책 이야기를 하면 기뻐하는 분들이 많다. 물론 거짓말은 없다. 늘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사실 이 이유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인터뷰에 있어서는 다소 시시한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목소리 높여 말하지 못했었다.
메일을 쓰는게 정말이지 서툴렀다. 파멸적이었다. 센스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 잠깐 떠올려봐도 위장이 움푹 짓눌리는 듯한 괴로운 감각에 휩싸인다. 내 메일을 받은 사람에게는 저주의 스팸 메일을 받은 것보다도 민폐를 끼쳤으리라고 회고한다. 20대 초반, 처음으로 내 소유의 컴퓨터를 갖게 되어 PC 메일을 하기 시작한 무렵의 글을 검색해본다. 열리지 않는 문을 따는 것처럼 겁을 내며 엔터키를 누르니 거기에는 전혀 다른 나 자신이 있었다.
'알겠슴당'
극혐이라는 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오타가 아니었다. 꽤 오래전에 나는 '습니다'를 '슴당'으로 바꿔 쓰는 걸 재밌어했던 것 같다. 몸에 알을 품은 바퀴벌레를 살아있는 채 꿀꺽 삼킨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구역질이 나며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글이 그곳에 있었다. '왜 이딴 글을 쓴 거지' 라고 당시 메일 발송 버튼을 누른 순간에도 이렇게 생각했고, 메일 화면을 열 때마다 절망했었다. 이렇게 센스 없는 것에 모자라 아무리 정중하게 글을 썼다고 생각해도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게 전혀 전달되지 않는 비루한 언어능력이 압도적으로 이기고 만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과 실제 쓰여있는 말이 뭔가 다르다는 건 알고 있지만, 달리 떠오르는 게 없어서 발송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런저런 일들이 늘어가면서 메일의 필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수많은 메일을 보내고, 생각하고, 다시 고쳐봐도 글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면 업으로 삼아보자. 억지로라도 일이라고 생각하고서 쓴다면 다른 사람 눈에 띄게 될 것이고 이상한 글은 편집자나 세간에서 부정적인 반응이 있을 테니까 강제로 글쓰기 실력이 늘 수 있다. 만약 내 글쓰기 실력이 언젠가 좋아져서 누군가에게 칭찬받는다면 그건 실천이 센스를 뛰어넘은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편집자 몇 명을 만나러 가서 뭐라도 쓰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감사하게도 잡지 바깥 부분에 한마디 칼럼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글을 써도 전혀 즐겁지 않았다. 센스 없는 자신의 글을 계속해서 마주 봐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납득이 안 가는 글이라도 마감기한까지는 제출해야 한다. 이러니저러니하는 동안 글자 수는 점점 늘어나서 어느새 책을 낼 정도가 되었고 몇 년이나 계속해서 써온 결과, 지금은 내 생각을 그래도 글로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메일을 쓰는 일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하나의 이야기를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전할 수 있으니 직접 말하는 것보다도 자유롭다고 느꼈다. 지금은 글을 쓰는 일이 너무나도 즐겁다. 언젠가부터 만화도 잘 안 보게 되고 소설이나 수필을 읽는 일이 많아졌다. 오로지 활자뿐인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현실감 있는 인간미를 느끼거나, 종잇장 속 세상을 여행하며 모르는 장소에 간 듯한 감각에 빠지거나,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간듯한 즐거운 기분을 알게됬다. 상상력의 모터가 풀가동하는 즐거움, 독서의 쾌감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작가로서 에세이를 쓴다는 것, 눈으로 본 풍경과 마음 속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일종의 힐링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본 걸까. 어떤 풍경을 보고서 마음이 움직인 걸까. 그 마음은 어떤식으로 움직인걸까. 거기서 무엇을 생각한 걸까.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이라도 글로 잘 써냈을 때 마음속이 깨끗이 정돈된 것처럼, 막 청소를 끝낸 욕조에 들어가 깨끗하게 몸을 씻은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되었다.
"호시노씨는 왜 글을 쓰시나요?"
실제로 대답할 때는 '이런 이유로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이 길어져버리니까 '마츠오씨와 미야자와씨를 동경해서요' 라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의 과제는 좀 더 간결하고 자유롭게 말하며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마음의 말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호시노 겐 에세이「되살아난 변태, 蘇える変態」 180.181p 번역 (0) | 2022.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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